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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이야기

[스크랩] 제주의 역사/ 조선시대

수호천사지 2010. 3. 5. 16:50

 조선시대 역사 개괄

제주목에는 정3품의 목사와 목사를 보좌하는 종5품의 판관, 그리고 대정과 정의 양현에는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고, 관아의 설치와 성이 구축되면서 그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제주도에는 조선 태종 16년(1416)에 제주목과 대정현, 정의현의 1목 2현제가 정립된다.
이른바 제주삼읍이라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제주목에는 정3품의 목사와 목사를 보좌하는 종5품의 판관, 그리고 대정과 정의 양현에는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고, 관아의 설치와 성이 구축되면서 그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인구도 고려 원종 15년(1274)에 1만 223명이었던 것이 조선 세종 때에 와서는 삼읍의 민호가 9,935호, 인구가 6만 3,474명으로 급격히 증가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과밀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실업자는 전라도와 충청도로 이주시키고, 범죄자(특히 牛馬賊)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인구의 포화상태를 어느 정도 완화시키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게 되자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성종 원년(1470)부터 인조 2년(1624)까지 약 150년 동안에 섬 안의 굶주리는 난민들이 도외 각지로 유망해버려 삼읍 인구가 급격이 감소된 것이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국법으로 유망을 금지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출륙금지였다. 인조 7년(1629)부터 순조 25년(1825)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제주도는 바다에 떠 있는 감옥으로 화하여 도민은 폐쇄된 생활을 영위하여야만 하였다.

한편 15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출륙한 제주도민, 즉 제주도를 불법적으로 이탈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연안에 정착하여 사는 제주도민을 두무악(頭無岳)이라 하였다. 이른바 두무악은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 통치력이 강화되면서 제주도의 공물과 부역이 증대되고 관부의 수탈이 격심해지면서 발생하였다. 산물의 부족으로 곤궁한 생활을 면치 못하던 도민들이 과중한 부역을 감당하지 못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경상 전라 연해지역으로 출륙하여 정착한 두무악들은 언어와 습속 등 생활양식의 차이로 그곳 주민들로부터 기피되었고, 또 정부로부터도 치안상 우려되어 강력한 통제를 받는다. 이리하여 두무악들은 전복을 따는 일과 같은 진상용 해산물을 채취하여 납부하는 일을 전담하면서 육지인과는 격리된 가운데 그들만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또 이들 두무악들은 수시로 원주지인 제주도로 추쇄되기도 하였으나 점차 육지에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여 17세기 이후에 와서는 군역을 지면서 일반 양인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게 된다.

제주도는 조선왕조 약 500년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귀양살이했던 곳이다. 제주도는 육지와는 격리된 절해고도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유형지로는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다. 그것은 죄인을 먼 곳에 격리시킨다는 의미와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조선조 약 500년을 통하여 거의 200여 명에 달하는 유배인들이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것이다. 그 신분도 위로는 광해군과 같은 폐왕이나 왕족, 정치인, 학자로부터 승려와 환관ㆍ도적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이었다.

선조의 7남인 인성군의 3남 이건(李健)도 인조 때에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그는 《제주풍토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조밥이고, 가장 두려운 것은 뱀이며, 가장 슬픈 것은 파도소리다.”라고. 당시의 사정을 잘 반영해 주는 글귀다. 유형은 기한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종신형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만 정세 변화에 따라 방면되거나 사면된 뒤 재환의 길이 열려 다시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있었고, 혹은 사사되거나 다른 지역으로 유배지를 옮기는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사면 후 아주 제주도에 정착하여 입도조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창석 교수(제주대학교 사학과)

출처 : 키즈환경학교
글쓴이 : 환경지킴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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