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제주도는 당초에 군으로 편제되었으나 의종 때에 현으로 강등되었고, 고종 때에 다시 군으로 환원되었다가 충렬왕 21년에 가서는 제주목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제주라는 명칭은 이미 고려 고종 때(13세기)부터 사용되었다. 다만 몽골의 지배 때는 제주도가 그들의 직할지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항상 탐라ㆍ혹은 탐라국으로 호칭하였었다. 그러나 충렬왕 20년에 고려에 반환된 뒤에는 다시 제주로 고쳤다. 한편, 고려조정에서 관리가 파견되면서부터 수탈이 자행되어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선정을 남긴 관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민란의 주된 요인은 관리의 가렴주구와 토호 권세가의 토지침탈, 조세ㆍ부역의 가중 등을 들 수 있다.
삼별초가 제주도에 처음 들어온 것은 원종 11년(1270) 10월 말경이었다. 이문경이 거느린 삼별초의 선발대가 명월포에 상륙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 조정에서도 삼별초의 세력이 제주도에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영암부사 김수를 보내어 군사 200명으로 제주도를 지키게 하였고, 뒤이어 고여림 장군에게도 군사 70명을 거느리고 들어가 김수와 합세하게 하였다. 이들 고려 관군이 제주도에 들어온 시기는 삼별초보다 약 한 달 앞선 9월 중순경이었다. 그리고 이 때 삼별초의 입도에 대비하여 보루를 쌓다가 삼별초가 상륙하자, 결국 이들 고려 관군과 삼별초간에 공방전이 전개된 것이다. 그 격전지는 송담천 일대였다. 명월포로 상륙한 이문경이 제주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제원에 진을 치고 송담천에서 관군을 맞아 싸웠던 것이다.
그 결과 관군이 패했는데, 그 이유를 《졸고천백》에는 현지 방어군이 적극 협력하지 않았고 현지 주민들 또한 삼별초를 도왔기 때문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승리한 이문경은 수륙 교통의 요지인 조천포에 거점을 마련하여 비상시에 대비했다. 그런데 당시 제주도 주민들이 삼별초를 도왔다는 것은 단순히 대몽 항쟁을 전개하고 있는 삼별초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지금까지 겪어온 관리의 수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삼별초를 도왔던 것이다.
그 뒤 원종 12년(1271) 5월에 진도가 고려ㆍ몽골 연합군에게 함락되자 김통정이 잔여 세력을 이끌고 제주도로 들어왔다. 이 때 남해현을 점거하고 있던 유존혁도 80여 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들어와 합류했다. 이들은 항파두리를 그들의 본거지로 정하였다. 이 지역은 3면이 하천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다가 눈앞에 보이는 천혜적인 요새였다. 제주도에 들어온 삼별초는 진도에서의 패배가 뼈저렸기 때문에 방어시설부터 서둘러 착수했다. 즉, 삼별초는 제주도에 들어온 뒤 약 1년 동안이나 방어시설의 구축에 전념하였다. 대외활동은 그 이듬해인 원종 13년(1272)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연안 지방이나 도서 지역에 침입하여 지방 관리나 몽골인 병사를 살해, 납치하거나 공물 운반선과 전선을 약탈, 혹은 불태웠다. 이는 항전에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는 동시에 적의 해상 작전을 봉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 대상이 연안지방에 그쳤음은 그만큼 그 세력이 진도에 있을 때에 비해 위축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삼별초의 연해 지방에 대한 공략으로 난처해진 것은 고려와 몽골 양 진영이었다. 고려에서는 몽골에 사신을 보내어, 삼별초의 잔당이 제주도로 도망해 들어가 여러 섬을 노략질하는데, 장차 육지로 나올 것이 염려되니 이들을 섬멸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른다. 몽골 쪽에서도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인 제주도가 삼별초의 수중에 들어감에 따라 삼별초와 일본 두 지역의 정벌 문제로 고심하게 된다. 결국 원종 14년(1273) 4월에 1만 2천명의 고려ㆍ몽골 연합군에 의해 삼별초는 역사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삼별초가 평정된 뒤, 원종 14년(1273)부터 최영에 의해 목호(몽골인 목자)가 정벌되는 공민왕 23년(1374)까지 제주도는 약 1백년 동안 직ㆍ간접으로 몽골의 영향을 받게 된다.